우리는 선택된 삶이기도 하고 랜덤이기도 하다. 즉 필연이면서 우연인 존재다.

 

공평이란 말을 많이 한다. 부모가 가진 여러 환경적 인성적 그리고 가치관에 의해 자식은 크나큰 영향을 받게 된다.

백인백색이어서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자라나느냐에 따라 자식은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다. 

그렇게 될 리도 만무하다. 또한 여러 가지 불규칙적인 변수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족쇄를 풀어나가는 운명도 분명 존재하니 인간 세계는 참 다양하게 전개된다. 하찮은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그 무엇 그 이상 그리고 그 이하이기도 한

 

가끔 인류 최초의 직업이 매춘이라는 말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는 이상한 논리를 접한다. 그렇지만 샤머니즘, 즉 종교가 실은 최초의 직업이란 생각이다. 미신은 언제나 신비주의를 낳고 광기를 종교적으로 포장한 샤먼들이나 사제들이 그들의 생존 방식이자 직업이지 않을까.

 

서구에서 그냥 문화로 체화된 기독교가 10%대의 신도들을 품은 채 도태되는 상황이고 그렇게 난리치던 한국의 기독교도 어느덧 서구의 길을 걷고 있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개별 교회주의라서 종교직 종사자의 부패와 범죄는 그야말로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 작은 종교 권력을 신도들이 부여하고 그 부여된 작은 권력으로 신도들에게 갈취하고 기만하고 또 착취하는 무위도식의 순환구조

 

그들 개신교인들은 그들끼리 동족이라 칭한다. 배타적이고 되먹지 않은 선민인양 그들끼리 세상을 만들어 간다. 이미 신라 석굴암 건축양식엔 기독교 양식과 이슬람 양식이 내재된 문화재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종교로서 거부된 과거의 서구 문화다. 그런 종교가 역사적 혼돈 속에 제국의 첨병으로 이 땅에 들어와 무당과 무속을 흡수해 서구서 유래한 개신교인양 변형된 무당짓을 하고들 있다. 이미 암흑시대와 유럽의 양차 세계대전을 거친 후 사망선고를 내린 그 애증이 교차하는 유대 야훼(Yhwh)가 돈벌이로 버젓이 악용되고 있음이다. 종교는 순종이지 결코 성숙을 요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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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을 조립하는 일은 형이하학이 하는 중요한 과제다.

종교를 더욱 복잡하게 요리하는 일은 언어가 도맡아 하게되고

언어는 새로운 미로를 만들어 점점 알 수 없는 지경까지 만들어낸다.

 

자 우리는 종교적 지도자가 될 수도 있고 신실한 신도도 될 수 있다

우린 종교란 숭고한 이름아래 생각과 미래를 의지하려 하면 할수록

정작 우리가 겪어야 하는 일상생활이란 현실을 도외시 하기 시작한다.

 

제7일 안식일교나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개신교까지

종교적 재단과 종교적 율법은 한 인생을 완전하게 바꿔 놓는다.

종교적으로 세상을 평가하고 종교적인 잣대로 사람을 구분하기에 이른다.

 

종교가 말하는 사랑, 자비, 평화는 종교가 자체가 부정하는 것들이다.

종교는 재물을 탐내고 외형상 거대한 조직으로 만들려는 속성이 있기에 말이다.

우리가 믿으려는 신 혹은 교조는 인간의 탐욕에서만 숭고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재물을 얻지 못하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미신이라 치부된다.

 

연기론 안에서 우린 자꾸만 내적인 깨달음을 찾아 헤매고만 있다.

인간의 고통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의 법칙에 기인한다

인간은 결코 운명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간이 만들어낼수 있는 것이란 고작 세뇌와 최면 뿐이다

 

환각제를 만들고 환상을 만들며 착각을 하며 살게 하는 유용한 도구로서의 종교

그것조차 위안이되거나 위로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사는 게 고통스럽고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99%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다는 그 오랜 과거에서 부터 우리에게 강한 메세지를 전달해준다.

 

현실에 충실하고 현실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운명을 긍정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라고

아픔과 슬픔과 기쁨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면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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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가 무섭다!

 

신도들 등쳐먹고 상당한 국부를 소유한 거대자본화한 개신교가 두렵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혹세무민했고, 혹세무민할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카톨릭 사제의 탐욕과 부패를 향한 저항이고 시민혁명이었다. 900명이 넘는 사제들이 맞아죽거나 처형됐다. 프랑스 혁명을 논하면서 이 부분은 늘 누락되어 있다. 지금 개신교의 상황이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개신교는 기득권이다. 돈이 많아 기득권의 편에 붙어야 한다. 그들은 한국역사를 왜곡한다. 유일신 야훼를 숭배하며 야훼의 이름으로 목회자는 신도들의 돈을 정당(?)하게 뜯어간다. 친일개신교 서북청년단 깡패들이 남한에 들어와 빨갱이 때려잡는다고 민족주의자를 학살했다. 친일이어도 빨갱이만 부르짖으면 그게 애국의 논리였고, 지금까지도 유효한 구호다.

 

용정 명동촌 목사들은 조선의 전통제례를 지키는 조건으로 개신교를 받아들였지만, 나머지는 친일을 사죄하지 않은 채 살아남은 개신교 목회자들이다. 그들은 군사독재시절에도 시녀를 자처했다. 조찬기도회에서 군부독재를 찬양했다. 과거 황국신민임을 찬양했듯이, 이제는 미국을 찬양한다. 개신교를 비판하면 그것도 빨갱이라 매도한다. 그들의 반역과 부패와 범법은 이렇게 조용히 묻어간다. 강자에게, 권력에 빌붙어 비열하게 사는 종교 우린 그 종교를 개신교라 부른다.

 

두렵다! 그들이 국교가 되면 매커시즘(마녀사냥)으로 나라는 피바람이 불 것이다. 그들이 권력을 가지면 지금 정권과 같은 삽질들이 계속될 것이다. 단군, 겨레는 없고 야훼만 있다. 아니 야훼는 상표이고 상품이다. 그 수혜는 목회자의 차지다. 아직도 그들은 친일부역자와 손을 잡고 '빨갱이' 논리로 세상을 조작한다. 빨갱이는 기득권을 살리는 유일한 무기다. 전쟁이 나거나 독재권력을 잘못 휘두를 때 이 땅엔 또 다시 애국자의 피로 물들 것이다. 반역은 살고 애국은 죽는다. 우린 그렇게 해방 후 역사를 만들어 왔다.

 

그래서 역사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애국은 살고 반역은 단죄해야 한다. 지금 자기나라 비하하는 군상들은 또 다시 일군국주의 부활이나 중화 패권주의 그리고 어떤 방식의 위기가 닥쳐올 때 매국행위를 눈 깜짝하지 않고 실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작자들이 아직도 살아서 대대손손 잘 살기에 말이다. 보수정당은 한국에 없다. 친일 매국 사대주의 정당만 존재할 뿐이다. 우린 프랑스의 좌파우파 개념이 아닌 가짜가 진짜처럼 행세하는 나라다.

 

그 가운데서 자본을 축적하며 그 반역의 정점을 파고든 개신교가 무섭다. 아니 가증스럽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막대한 자본을 갖고 투기성 자금으로 전환해선 또 다시 막대한 돈을 번다. 그들은 그들의 그 많은 돈이 사회환원이란 순기능적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기업가로 부를만하다. 실체가 없는 상품으로 이렇게 눈먼 돈으로 만든 그 신도들이 가엾다. 진실로 그들이 천국을 간다면 좋겠지만, 천국으로 가는 길에 돈이 필요하다면 난 가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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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도피적이거나, 종교적인 반이성을 강요하는 종교들이 주장하는 올바른 깨달음은 회의적인 벼랑끝에 도달한다.

끊임없이 알고자하는 욕구들은 결국 신을 상정하면서 포기하게 된다. 불가지론으로 정의내리는 만물의 법칙은 초자연적 존재의

창조물도 아니거니와 비스무리하게 뭉뚱그리며 우주의 법칙이라고 말하는 불가의 궤변도 아닐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세상과 더더욱 밀접하게 충돌하면서 생기는 불규칙과 다양성 속에서 복잡다단해지기 마련이다.

세상을 상투적이고 획일적인 논리로 바라보는 소위 종교적 아포리즘은 맞는 말이지만 각개인의 정서와는 무관한 진리이며,

나아가선 바라지 않는 관계의 연속인 사회 메카니즘을 몰이해하는 진부하고 이상적인 말들로 채워진 과거의 유산일 뿐이다.

 

종교가 말하는 사랑, 자비 구체적으로 빛과 소금이 되려는, 중생을 위해 준다는 사상은 그 종교직에 종사하는 목사나 승들에게도

역시 추상적이고 실현할 수 없는 일들임엔 틀림없다. 21세기 한국의 종교가 갖는 특징들을 집약해보면 상업주의에 철저하게

무임승차하는 종교장사꾼들로 보여진다. 그들의 위장된 모습들은 각시대마다 정권의 시녀로 자청하거나 요즘처럼 물질주의를 숭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이 실천할 수 없는 것들은 신이나 교리로 틈을 채우거나 변명하면서 부귀영화의 돈벌이에 집착한다.

 

모든 집단은 구성원의 자질과 실천의 유무를 따지면서 평가하게 되는데, 종교집단은 비생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교리로 대중을 착취한다.

인간 본연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종교의 교묘한 무위도식의 방법들은 특히나 여성들을 현혹하는 본질면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다.

한국의 종교는 재산을 축적하는 속도가 대기업을 능가한다. 형이상학과 신을 팔아가면서 종교적 맹신을 유도하고 주머니를 비우게 한다.

 

몇백조에 달하는 종교재산은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0.3% 미만의 환원을 통해 면죄부를 주고받는다. 특정 종교가 주장하는

사랑과 자비는 이미 거덜난 상태인데도, 종교라는 특권으로 인해 용서되고 무마되는 이 시대 역시 미개한 사회임을 또 다시 증명한다.

신도들 자신의 정신적 위안은 허구에 저당잡히면서, 정작 주위에서 절망하고 죽어가는 낙오자들에겐 냉정하다.

종교는 확연하게 여성성을 갖는다. 종교엔 한없이 주고 베풀면서 자신의 주변엔 한없이 냉정한 '사랑'의 이기심 말이다.

 

이러한 종교적 성향의 여성들은 아직도 종교장사엔 축복된 '봉'들이다. 설교와 법문을 통해 종교의 바운더리를 지키고, 가식과 위선을

가르치는 종교직 종사자들은 여성을 현혹하는, 돈을 갖다 바치는 테크닉이 날마다 일취월장하고 있기에 말이다. 종교가 재산 개념이

없다는 것은 종교의 의무이자 당연한 논리다. 아무런 노동도하지 않으면서 대우받는 일들은 분에 넘치는 처우임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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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글자가 없던 시대엔 현자의 말이 깨달음의 방식이었고, 활자가 만들어진 역사시대엔 책이 그것을 대신했으며, 오늘날 인터넷이란

매개체가 또 깨달음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깨달음의 궁극적인 수단은 '정보'에 의해서다. 정보는 지식을 포함하며, 진실을 알고자 하는

종합적인 개념이다. 이미 왜곡된 세상(보들리야르)에서 깨달음은 더욱더 넘쳐나는 정보들을 수집해선 분석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힘들다.

 

인간의 본질과 실존의 양상은 학문이 세분화되고 분절화되면서 과거 낡은 종교의 수행방법과 교리를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종교 교리가

너무도 쉽게 공격받고 무시당하는 이유는 종교의 탄생배경과 적나라하게 파헤쳐지는 실체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다해도 종교는 아직도

건재하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기엔 너무 정보에 어둡고,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다.

 

알다시피 기독교는 그들 경전이 일점무오하다는 일방적이고 이분법적인 신념을 강요해서인지 경전에 반하는 과학이론은 이단이고 사탄의

학문으로 매도해왔다. 신본주의는 몇백년 동안 이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에 의해 무참하게 깨지면서, 종교는 더욱 카멜레온처럼 융통성을

지니게 된다. 문제는 관념적이고 개인 경험적인 종교적 깨달음을 증명하기 힘들다는 연유로 지금까지 종교의 신비적인 체험으로 보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것을 혹세무민이라 속단하진 않는다. 다만 각분야의 학문이 이루어 논 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러한 신비감도

거의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동양이 품고있는 음양의 법칙이라든지, 불교가 내세우는 연기이론같은 경우, 양자물리학이나 천체물리학에서 같은 유사한 만물의 법칙을

갖고 있다고 증명한들 그 사상이나 이론은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똑같은 철학을 갖고 있었다. 어느 지역 혹은 문화의 특수한 발상이

아니란 이야기다. 또한 힌두, 브라만, 불교 자체도 동양보단 아리안 계통의 전수된 사상이 더 강하다. 희랍철학은 분석적이였고, 동양은

신비주의에 가깝다. 그렇다해도 근본적으로 보자면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에 고민의 흔적들이 역력하게 보인다. 우열은 없고 차이만 있을

뿐이다. 수 많은 세월 지역적인 고립이 있었고, 독자적 발전이 있었던 것 뿐, 단지 사유하는 방식이 다름만 있었다.

 

세상을 경험하지 않고는 세상을 단정짓지 못한다. 속세라고 규정지으며 애써 현실도피하고, 신비주의를 확장하지만 그들이 도피한 속세의

도움없인 종교가 살아나갈 방법이 없다. 종교적인 수행을 한다는 명목으로 종교인들을 추종하는 행위는 인생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종교인들에게 해소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문제는 아직도 상투적이고 가식적인 정의가 신도들에게 먹혀들어간다는 것

깨달음을 얻기위해 수행한다는 종교인치고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이 드물다. 이기적인 사람들이 사는 방법이 바로 수행하는 일이다.

 

어차피 종교나 속세라고 규정짓는 세상이나 고뇌하고 번뇌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속세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더불어 살고, 남을 위해 무언가

하려는 사람들이 더 깨우친 이들이다. 종교는 언제나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지 못한다. 세상을 연기라고 그럴듯한 법문을 읊으면서

정작 그들은 연기로 사는 방법을 모른다. 사유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연기 수행은 몰핀이나 마약을 주입하는 일과 같다.

 

빈한한 이들에게 연기는 사치스런 일일 것이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연기는 중생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궤변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들의 인연생기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깨달음은 이기적인 행위다.

연기, 제행무상, 제법무아, 무명을 아무리 이야기한다 한들 그것은 욕심과 분열만 조장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수 천년 동안 종교가 한 일이라곤 거대한 사찰과 분열된 종파 돈벌이 그리고 식민지배를 당한 역사 밖에 없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무위도식하기에 여념이 없다. 현실도피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보니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수행은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그 도출된 결과도 철저하게 개인의 몫이다. 그것이 종교가 아니더라도 개인의 고통은

극복하게 되어있다. 종교적인 교리를 이용해 무엇을 깨달았다는 생각은 '의존적'인 본성의 발현일 뿐이다.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습관이고 자가당착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수행도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 모든 종교의 형식은

복합적인 문화의 짜깁기다. 신비체험이니 초자연적인 것들은 특수성의 조합이기도 하다. 보편성을 띨 수 없는 일들이다. 이 또한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과학으로 풀리고 있다. 믿음은 맹목적이라 근본적인 해결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깨달음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하는 그 모든 교리는 껍데기다. 깨달음을 수행하는 대다수가 궤변론자이고 비현실적인

말장난을 구사한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우리민족의 신적인 끼는 예술과 노동으로 풀어야 한다. 깨달음은 환상이다.

자신만 깨닫는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체험했는지 그 패턴도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보여지고 인간이 깨달을 정도로

우주만물의 법칙이 만만한게 아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 유도하다보면 과대망상과 유아독존을 조장하는 꼴이 된다.

차라리 조건없는 사랑, 베푸는 사랑을 하는 편이 훨씬 정신 건강에 좋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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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에서 설파하는 '인연생기', 즉 '인연' 혹은 '연기'라는 개념은 사유에 많은 혼돈을 주는 단어다.

현대 물리학이나 양자학 분야에서, 더 나아가 우주물리학과 천체물리학은 우주에서 생성된 모든 물질의 기원을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빅뱅' 이론을 상정하고 들어가자면 특이점에서 폭발하여 에너지가 우주의 물질을 구성했다는 이론으로도 연기는 제법 통하는 듯하지만,

사실 불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연기론은 인간의 숙명론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정적인 종교라고도 평가하는 불교는 이미 14세기 상봉에 의해 '오랑캐'의 종교라고 낙인찍힌 종교였고, 무위도식과 혹세무민의 틀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려말기 승려들의 백성에 대한 온갖 패륜범죄와 패악질은 극을 달했었다. 그 바톤을 이어받은 종교가 지금 역병처럼 창궐하는

개신교일 것이다. 인도의 모헨조다로 문명과 그 언어인 샨스크리트 문자는 셈-어족의 문법구성을 이루고 있다.

주어+동사+목적어 순으로 지금의 알파벳 문화권과 중국의 어순과 같다. 초창기 [사기]를 보면 그 어순은 알타이어 문법을 보여주다가,

동이족과 차별을 두려고, 서서히 셈어족의 문법으로 바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교는 알다시피 서구적 사유의 산물이며 종교다. 불교를 동양적인 정서에서 나온 종교라고 보는 견해는 넌센스이며, 잘못된 인식이다.

근본적으로 이분법적 세계관(선과 악, 내세관념)을 갖는다. 인도-서아시아가 지닌 지리적 문화적 공통성은 인종과 언어 그리고 종교적 이론들에서

나타난다. 인도는 모든 문화의 하이브리드였고, 카스트의 천국이고, 무법천지였다. 그런 나라에서 자이나교, 힌두교와 같은 반열의 불교는 지배자의 

억압을 정당화하려는 '숙명론'으로 무장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업보로 인해 현생의 삶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착하고 선한 마음으로 

지배자에게 순종하고 굴복하면 다음 생애에선 지금의 카스트를 극복하고 태어날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원죄론과 하등 다를게 없는 억압이며, 세뇌이자, 숙명론을 이루고 있는 근간이다.

 

모든 정치적인 음모, 그리고 모든 종교적인 행태는 지배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또한 혹세무민과 무위도식을 누리려는

악의적인 것들이다. 숭고한 노동의 결과를 착취하면서, 노동을 천시하는 계급화는 지적 정보가 엄청난 현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게 먹혀들어간다.

자유와 노동을 양보하는 대중은 민주주의를 누릴 권리가 없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순종과 평화를 주장하는 종교를 따르는 대중에게 자유는 사치스런 것이다.

한국에서 불교는 다시 고려시대 불교로 회귀한다.

더군다나 같은 뿌리인 기독교와 더불어 대중이 이루어야할 변화의 의지를 누른다.

그들은 가진 것이 너무 많은 비대한 권력이 되버린 것이다. 종교는 예나 지금이나 무용한 사기극임에 틀림없다.

 

종교 이론과 교리라는 이름으로 숭앙하는 가운데 진정한 자아를 잃고, 사람과 관계 속에서 관계의 의미를 잃고 있음이다. 무슨 신자, 무슨 신자라는 구분을 하며, 정치 패거리 룰같은 경전을 신봉하며, 차별과 반목을 당연한 것으로 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종교는 나와 남을 구분하기를 즐겨한다. 그래야만 광신, 맹신이 생기고 부를 챙기고, 무위도식을 할 수 있기에 말이다. 인연은 기독교의 땅끝전도와 의미가 상통하다. 인연으로 만들어진 세상을 불교는 지금까지 어떤식으로 존속했는지 자문하기를 바란다. 패배주의와 자아도취 그리고 현실도피만 가르친다. 이 세상을 아직도 인도의 카스트처럼 여기며 설교하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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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과 개신교

 

최근 손봉호 명예교수는 타락한 교회의 중심에 한기총이 있다하여 한기총 해체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기총은 통합과 예장이 빠져나가면 실질적으로 껍데기만 남는다. 개신교는 250여개가 넘는 이단 종파가 있다. 個敎會(개교회) 중심이기 때문에 교회 담임 목사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그들이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가 가능하다.

 

대통령을 무릎 꿇린 길자연 목사는 현재 칼빈 대학 총장에서 사퇴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다. 손학규 민주당 의원 또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진이 퍼져 있는 상태다. 개신교가 미군정 하지 중장에 의해 본격적으로 지지를 받은 이래 66년 만에 개신교의 세력과 권력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반증하는 사례들이다. 겉으로는 한국이 개신교 국가인 것처럼 보여진다.

 

그나마 종교적으로 분열과 반목이 적었던 이 나라에 최근 장로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비공식적으로 불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한민족과 1500년 이상을 토착 종교로, 호국불교로 자리잡은 불교 입장에선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그 특정 종교의 탄압이 만약에 개신교였다면 아마도 심각했을 것이다.

 

중심과 주변

 

포화 상태에 있는 개신교는 더 이상 국내에선 신도 확보가 어렵게 됐다. 매년 아니 수시로 쏟아져 나오는 예비 목회자들은 가망없는 개척교회를 운영하면서 대형교회를 꿈꾸지만 어림없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이미 개신교가 종교사업에 혈안이 된 종교라 인식이 팽배해진 가운데, 시간이 갈수록 부정적인 요소와 폐해가 속출하고 있다.

 

검증되지 않은 목회자의 양산은 개신교의 특성상 이러한 쇠퇴의 양상은  예정되어 있는 수순이라고 본다. 초기에 자리잡은 교회는 재정적, 인맥이 두둑하게 형성해 기득권화 되어있다. 그러나 후발 주자들은 중심에 서기가 힘겨울 수 밖에 없다. 주변으로 밀려나면서 기득권이 아니기에 기득권을 공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주변으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속세에서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면서 전도를 하고 목회 일을 하는 목회자들은 그 자체로 '이중성'을 요구한다. 속인들을 설교하기 위해 종교적 자아가 되어야 하고, 생존을 위해 종교는 다시 일상적 자아가 되어야 한다. 종교는 생업 수단이지만 무노동을 원칙으로 한다. 종교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 목회자들에게 종교는 또 다른 범죄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일 뿐이다.

 

범죄의 소굴

 

노동을 하지 않고, 경전으로 혹은 신을 팔아 생존하는 목회자 제도는 철회되어야 한다. 그 자체가 한기총 해체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한기총의 해체 운동의 이면에는 범죄가 만연한 개신교 집단이 국면타개를 위한 술책으로 밖에 안보인다. 종교인은 구도자이며 수도승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 루터의 개신교는 난센스였다. 시초부터 종교를 부정하는 종교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종교의 쥐방울만한 권력은 교회내 신도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악행의 수단이다. 신과 목회자를 동일시 하려는 그 권력은 이미 부패하고 타락한 사기술이다. 성범죄, 재산탈취, 과다한 십일조, 각종 헌금 등 그 명목도 범죄도 다양하고 지능화되어 간다. 종교 사업은 확장된다. 국가가 지원하는 복지나 지원금을 노리면서 종교의 이름을 걸고 '선행'을 하는 것처럼 합법화시키면서 세금을 다시 축낸다. 개신교는 너무 방만하고 무법천지에서 성장해 왔다. 종교 아닌 종교로 너무도 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 악까지도

 

개신교에 들어간 기부금이나 모금에서 얻어진 돈은 10% 이하로 소외된 사람에게 지급된다. 8~9할은 떼어 먹는다. 치사한 짓도 서슴치 않는다. 개신교가 친일의 소굴이었고, 그 분위기가 오늘날까지 만연한 관계로 사대주의와 역사의식 부재가 판을 친다. 사회 현상에 대한 정확한 접근은 존재할 수도 없거니와 추진사업은 대개 이권을 챙길 수 있는 경제 논리로 돌아간다.

 

대형교회의 재산은 수조 이상이다. 남아도는 자금은(물론 헌금이나 십일조에서 나온 한심한 돈들) PF 자금 혹은 투자금으로 더 많은 재산을 증식하는 종자돈으로 활용된다. 물론 교회 신도들은 아무 혜택이 없다. 일반 국민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음이다. 그들이 생색내면서 사회에 환원하는 액수는 0.3~0.8%에 불과하다. 이를 사회에 기여하는 종교라고 정의 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무노동 무위도식부터 해체하라!

 

수도승이나 승처럼 금욕생활을 하면서 구도자의 길을 간다면 종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처자식을 거느리면서 그 자신 종교적 깊이와 철학 그리고 사유의 수준조차 얄팍한 가운데 신도들을 거느리고, 신도 위에 군림하는 행위는 사기와 범죄를 조장하고 교사하는 행위와 진배없다. 이 세상에 어떤 누구도 신을 정의 내리고 규정할 인간은 없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끝이 없다. 확신하지 못하는 신을 확신하는 것처럼, 그 신을 비웃는 듯이 버젓하게 행하는 불법과 패륜을 정당화할 수 없다. 자신보다 더 형편없는 한 인간을 목회자란 이유로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어리석은 군상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처음부터 신이란 단어로부터 관념의 비약이 시작되었고, 그 비약이 종교를 생업으로 하는 인간에게 무위도식을 누리게 한 것이다.

 

한기총 해체는 차후 문제다. 그 보다 먼저 개신교의 목회자 제도부터 해체해야 한다. 개신교의 본질은 '이중성'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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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어도 사람은 죽지 않는다. 사람이 죽으면 신은 죽는다. 다만 사람은 주어진 천수를 누리다 죽을 것이다.

자크 라캉은 "자기집의 존재는 타자"라고 말한다. 사람의 사유와 판단은 외부 환경에서 결정되고 지배된다.

대표적인 관념적 대상으로서의 신은 타자에 의해 보이지 않는 자아의 지배자로 자리잡게 만들어준다.

 

그 타자는 부모와 사회적인 관계에서 스스로 지배하기를 원하는 신으로 둔갑하는 변화과정을 거치며,

이미 체계화된 종교의 신을 자아화시킨다. 자신을 위한 신, 자신만을 위한 신으로 자신의 신을 섬긴다.

이러한 신앙화의 메커니즘은 수동적이고 사유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에게 더 빠르게 신념화된다.

 

이 세상은 죽음과 사후세계가 삶을 지배하지 않는다. 죽음의 공포와 사후세계는 종교만이 지배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 뿐만 아니라 1%도 파악하지 못한 저 우주의 경이로운 깊이와 넓이까지 우주찌꺼기로 만들어진다.

프랑크 시간과 척도의 시간과 법칙안에서 생성되고 영겁의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된 지적 생명체의 두뇌에 의해

신은 형상화되고 권력화된다. 그 종교적인 권력은 사람에게 신이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지배하려는 음모와 소수에게 권력을 부여해야 한다는 그 모든 신의 대리자는 사람을 기만하는 자들이다.

우주와 자연은 지배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파괴와 재활용 그리고 생존과 공생의 법칙만이 존재할 뿐이다.

 

신을 향한 도전은 결국 기민하는 인간을 향한 도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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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와 기독교

 

 

 

서울대 명예교수 손봉호씨가 개신교의 타락을 맹렬히 비판한다. 늦어도 한참 늦은 지금에야 자성하는 개신교 지성인이 나타났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미 일제의 관제종교로 패망 대한제국에 정착하면서부터 타락은 예정돼 있었다. 서울과 평양에 대형교회를 세워준 주체가 일본기독교연합과 참의원의 후원으로 성사되었다. 또한 선교사들은 민족과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 땅에서 노예종교화에 앞장선다. 민족과 독립의식이 존재할 수 없었다.

 

일제가 패망 후 미군정 하지가 개신교 근본주의자이고 친개신교 정책을 펼친다. 이승만과 하지가 친일부역자들을 등용한다. 친일세력은 하지와 이승만의 개신교에 과거전력을 숨기려 신자가 된다. 419혁명이 친일 박정희에 의해 좌절되면서 친일세력은 다시 한번 한숨을 돌리고 권력과 부와 헤게모니를 조장한다. 1026에 의해 박정희가 암살된다. 전범인 일본 수상 기시와 맥이 닿았던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도 쿠데타 정권을 일본의 협조아래 유지한다.

 

친일세력은 이 땅에서 단죄되지 않고 그 처벌의 시기를 또 놓친다. 기독교는 군사독재를 옹호하고 찬양한다. 친일세력의 본거지기 때문이다. 친일을 사죄한 적이 없는 개신교다. 근면하고 영리한 국민이 경제성장을 만든다. 더더욱 친일세력의 단죄는 요원해지고 오히려 기세가 등등해지고 철면피가 되어간다. 역사와 국민을 농락하고 있음이다.

 

명동촌 교회 출신 중 한 사람인 문익환 목사 같은 대종교를 바탕으로 개신교를 신앙하는 양심 있는 지성은 저항한다. 그에게 친일 개신교는 참을 수 없는 반민족적 종교다. 단군을 시조로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으로 이어진 대종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민족적인 종교다. 박은식과 신채호는 만주벌판 조선과 고구려, 고려의 유적유물을 답사하면서 조선사를 편찬한다. 그들도 대종교의 신도이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노력한다.

 

만주 항일 무장 독립군의 정신적 바탕은 단군의 대종교였다.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장군들은 모두 대종교를 숭앙하는 민족주의자였다. 박정희는 그들을 소탕하는 일본장교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주시경, 지석영, 이병기, 안재홍, 정인보, 최현배 등 한글(주시경)이라 최초로 명명하고 한글로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계몽하던 지성인들이 일제에 의해 해체된다. ‘단군성가’라는 노래가사가 책상에 놓여있다는 이유로, 대종교 신도들이란 이유로

 

일제는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고 항일 무장단체로 규정한다. 이미 만주 전역 대한제국 유민들은 대종교로 뭉치고 있었다. 일본군의 토벌대는 무자비하게 유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을사오적을 암살하기 위해 암살단을 조직했던 나인영(나철)이 대종교의 맥을 살렸고 대종교 지도자이자 부산 대지주였던 안희재는만주에 ‘발해농장’을 옛 발해의 수도에 설립해 대종교와 독립군을 양성한다. 하지만 일제는 1942년 “임오십현”이라 불리는 대종교를 대대적으로 뿌리뽑는 작전을 벌인다. 대종교의 대다수 지도자가 만주 역하감옥에서 사망한다. 대종교의 멸절위기에 놓인다.

 

기미독립선언문보다 일년전인 1918년 무오년에 “무오독립선언문”을 공표한다. 발기인 39인중 25명이 대종교인이다. 강단사학은 이를 말하지 않는다. 친일 하던 자신의 스승과 자신들이 설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친일하던 기독교는 일제에 붙고, 미군정에 붙고, 독재에 붙어 권력과 부를 친일세력과 나눠 가진다. 무소불위의 기득권으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진정으로 민족정신 함양과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날렸던 대종교는 무참하게 일제에 의해 와해됐다. 그리고 친일세력과 기독교는 이렇게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기만하며 기강을 흐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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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Archetype)모순의 부정적 신앙체계

 

 

 

사르트르(Sartre) 야훼(Yhwh) 패륜적인 시험(Test) 대한 독설(아브라함에게 적자인 아이삭(Issac) 제물로 바치라는), “ 신의 ID(신분증명서) 요구할 것이다라며 전지전능의 신을 냉소한다.

 

콘스탄티누스칙령으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확장에는 반골과 배타적 헤브류인들이 고집하던 선민의식의 유일(Only one)”이라는 통치 이데올로기만 차용하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종교직 종사자들의 생각은 종교적 권력과 세력확장으로 얻어지는 실리에 관심이 많았다.

 

르네상스 이후 이슬람교의 신학적 세련성과 평등성에 영향을 받은 일련의 계몽주의적 반기독교 사상가들의 맹렬한 공격(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 ) 대중들의 반성은 기독교가 저지른 악행에서 결코 자유로울 없었던 야훼에 대한 회의에서 휴머니즘은 출발한다.

 

신화(Myth) 허구(Fiction) 그리고 기원이 불분명한 여러 바이블의 원형들은 중근동아시아 제민족들의 유형들을 복사(Copy)하고 차용한 것들이다. 신비주의적 요소와 실증주의적 역사에 혼동하는 부분에 있어선 사제나 신자나 똑같이 겪는 갈등요소들이었다.

 

예수 콤플렉스(실존문제와 이슬람교의 예수 폄하) 시달리던 칼뱅과 루터에서 비롯된 개신교의 출발은 시작부터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잔인하고 독선적인가를 그들이 솔선수범해서 보여준다. 태생적 한계에서 자유로울 없음을 보여준다.

 

개신교 출범 이후 이슬람과 공유하던 토라는 은근슬쩍 유야무야하고, 선택된 공관복음의 예수시대 또한 선진적인 철학과 종교의 맥을 이어가던 이슬람 신학자들에겐 비웃음거리였다. 일개의 선지자인, 그것도 마호멧보다 열등한 예수가 신의 아들이라 주장하다니

 

개신교 목사직 종사자들이 지닌 바이블 난독증에 의한 여러 해석의 문제는 많은 종파의 산파역을 담당하면서, 유대교의 여러 신화적 원형들을 이해할 없거나, 자의대로 해석하는, 아니 해석할 밖에 없는 타민족으로서의 정서상 난맥을 보여준다. 신학자들의 노력들은 물거품이 된다. 해석의 유리함만을 채집하는 이단들의 난립만 초래하고 만다.

 

루터의 나라에선 유대인들을, 칼뱅의 분파인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도륙했다. 둘이 죽인 인류만 도합 1억이 넘는다. 스페인 카톨릭은 혼자 1억을 도륙했다, 개신교인들이 주장하는 개신교 국가의 부강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침략과 학살로 점철된 제국주의의 살인 면허 서의 기독교적 신념은 비극으로 이루어진 부강의 증표일 뿐이다.

 

종교의 신념은 이성과 논리를 무시한다. 그들의 정경이 신화이건, 짜깁기이건, 텍스트가 문맥도 맞고, 허접한 모순투성이라 해도 누군가 덤프 트럭으로 잘못된 것을 꼬집는 논문을 갖다 준다 해도, 그들의 믿음엔 변함이 없다, 자크 라캉이 말했던 것처럼, “자기 집의 주인 자기가 아니라 야훼(타자)” 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도 여러 정황으로 봐선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갖는 경제적 커뮤니티의 장소로서, 사교의 장소로서, 무엇인가에 열광하는 장소로서, 공동체 소속이 아닌 세상을 향해 선민의식을 조장하는 희열을 만끽하는 장소로서, 작은 지배의 광기와 배타적 본능을 자극하는 극단적인 대중연설이 먹히는 요소들도 다분해 진다.

 

이제 그런 미성숙하고 반사회적인 정서를 유럽인들은 버린지 오래다. 그들의 역사 속에서 같이 했던 기독교는 역사적 건축물로 아픈 과거 상징물이 되었다. 권력의 지배, 종교의 지배가 가져다 주는 광기의 역사를 몸소 체험했던 그들에겐 이젠 신화가 되어간다.

 

타자가 자신을 지배해야 하는지 궁극적인 질문을 던져야 때다. 자신들이 바치는 십일조가 천국의 길인지, 아니면 사람이 기꺼이 주는 헌금과 십일조가 세상과 국내의 어렵고 소외된 자에게 직접 전달될 나눔의 기쁨이 천국으로 이끌지는 성숙의 판단에 맡긴다. 돈으로 치부하는 자들이 순수하게 신앙하는 당신들을 비웃고 있다.

 

신도들에게 걷어내는 막대한 십일조와 헌금으로 겨우 사회에 기여하는 액수는 0.3~0.8% 이면서, 사랑을 외치는 종교직 종사자들의 ID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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