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글자가 없던 시대엔 현자의 말이 깨달음의 방식이었고, 활자가 만들어진 역사시대엔 책이 그것을 대신했으며, 오늘날 인터넷이란
매개체가 또 깨달음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깨달음의 궁극적인 수단은 '정보'에 의해서다. 정보는 지식을 포함하며, 진실을 알고자 하는
종합적인 개념이다. 이미 왜곡된 세상(보들리야르)에서 깨달음은 더욱더 넘쳐나는 정보들을 수집해선 분석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힘들다.
인간의 본질과 실존의 양상은 학문이 세분화되고 분절화되면서 과거 낡은 종교의 수행방법과 교리를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종교 교리가
너무도 쉽게 공격받고 무시당하는 이유는 종교의 탄생배경과 적나라하게 파헤쳐지는 실체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다해도 종교는 아직도
건재하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기엔 너무 정보에 어둡고,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다.
알다시피 기독교는 그들 경전이 일점무오하다는 일방적이고 이분법적인 신념을 강요해서인지 경전에 반하는 과학이론은 이단이고 사탄의
학문으로 매도해왔다. 신본주의는 몇백년 동안 이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에 의해 무참하게 깨지면서, 종교는 더욱 카멜레온처럼 융통성을
지니게 된다. 문제는 관념적이고 개인 경험적인 종교적 깨달음을 증명하기 힘들다는 연유로 지금까지 종교의 신비적인 체험으로 보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것을 혹세무민이라 속단하진 않는다. 다만 각분야의 학문이 이루어 논 결과물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러한 신비감도
거의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동양이 품고있는 음양의 법칙이라든지, 불교가 내세우는 연기이론같은 경우, 양자물리학이나 천체물리학에서 같은 유사한 만물의 법칙을
갖고 있다고 증명한들 그 사상이나 이론은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똑같은 철학을 갖고 있었다. 어느 지역 혹은 문화의 특수한 발상이
아니란 이야기다. 또한 힌두, 브라만, 불교 자체도 동양보단 아리안 계통의 전수된 사상이 더 강하다. 희랍철학은 분석적이였고, 동양은
신비주의에 가깝다. 그렇다해도 근본적으로 보자면 우주를 바라보는 시각에 고민의 흔적들이 역력하게 보인다. 우열은 없고 차이만 있을
뿐이다. 수 많은 세월 지역적인 고립이 있었고, 독자적 발전이 있었던 것 뿐, 단지 사유하는 방식이 다름만 있었다.
세상을 경험하지 않고는 세상을 단정짓지 못한다. 속세라고 규정지으며 애써 현실도피하고, 신비주의를 확장하지만 그들이 도피한 속세의
도움없인 종교가 살아나갈 방법이 없다. 종교적인 수행을 한다는 명목으로 종교인들을 추종하는 행위는 인생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종교인들에게 해소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문제는 아직도 상투적이고 가식적인 정의가 신도들에게 먹혀들어간다는 것
깨달음을 얻기위해 수행한다는 종교인치고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이 드물다. 이기적인 사람들이 사는 방법이 바로 수행하는 일이다.
어차피 종교나 속세라고 규정짓는 세상이나 고뇌하고 번뇌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속세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더불어 살고, 남을 위해 무언가
하려는 사람들이 더 깨우친 이들이다. 종교는 언제나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지 못한다. 세상을 연기라고 그럴듯한 법문을 읊으면서
정작 그들은 연기로 사는 방법을 모른다. 사유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연기 수행은 몰핀이나 마약을 주입하는 일과 같다.
빈한한 이들에게 연기는 사치스런 일일 것이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연기는 중생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궤변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들의 인연생기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깨달음은 이기적인 행위다.
연기, 제행무상, 제법무아, 무명을 아무리 이야기한다 한들 그것은 욕심과 분열만 조장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수 천년 동안 종교가 한 일이라곤 거대한 사찰과 분열된 종파 돈벌이 그리고 식민지배를 당한 역사 밖에 없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무위도식하기에 여념이 없다. 현실도피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보니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수행은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그 도출된 결과도 철저하게 개인의 몫이다. 그것이 종교가 아니더라도 개인의 고통은
극복하게 되어있다. 종교적인 교리를 이용해 무엇을 깨달았다는 생각은 '의존적'인 본성의 발현일 뿐이다.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습관이고 자가당착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수행도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 모든 종교의 형식은
복합적인 문화의 짜깁기다. 신비체험이니 초자연적인 것들은 특수성의 조합이기도 하다. 보편성을 띨 수 없는 일들이다. 이 또한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과학으로 풀리고 있다. 믿음은 맹목적이라 근본적인 해결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깨달음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하는 그 모든 교리는 껍데기다. 깨달음을 수행하는 대다수가 궤변론자이고 비현실적인
말장난을 구사한다. 재미있는 현상이다. 우리민족의 신적인 끼는 예술과 노동으로 풀어야 한다. 깨달음은 환상이다.
자신만 깨닫는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체험했는지 그 패턴도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보여지고 인간이 깨달을 정도로
우주만물의 법칙이 만만한게 아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잘못 유도하다보면 과대망상과 유아독존을 조장하는 꼴이 된다.
차라리 조건없는 사랑, 베푸는 사랑을 하는 편이 훨씬 정신 건강에 좋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