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친일’이란 무엇인가? 그 어떤 견제도 불가능하고 언제든지 노골적인 폭력으로 전락할 수 있는 무법 권력에 대한 부역행위다.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의 경우를 보라. 식민지 시대 부역자들이 그대로 권력을 이어받은 사회가 아니라면 자국민을 식민지 백성처럼 대하는 일은 가능하겠는가? 


친일파에 대한 단죄는 ‘민족정기’가 아닌,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필요하다. 권력과 폭력이 거의 동의어가 된 이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과연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 한국 사회 폭력화의 한 주범인 친일파에 대한 분명한 정리가 결국 사회 전반의 탈폭력화의 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친일 문제를 거론하려 하면 민족주의자로 오해받기가 쉽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친일에 대한 단죄는 바로 민족주의적 논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한데 친일을 단죄하자면 굳이 ‘민족’이라는 프레임을 위주로 논리를 전개할 필요는 사실상 없다. 일제 강점기의 정치적 지배 관계는 “이민족 지배”라는 차원에서는 물론 ‘민족’을 궁극적으로 비켜갈 수 없지만 ‘친일’의 ‘일’은 ‘민족’으로서의 일본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일본 ‘민족’의 언어나 문화에 정통하고, 일본 동지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결코 정치적 의미의 ‘친일’로 이어질 필연성은 없었다. 


김천해(1898~?)를 기억하는가? 울산 출신의 승려이자 계몽운동가로서 1921년에 도쿄로 건너간 그는 거기에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나아가서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일본 공산당으로 흡수되고 나서는 일본 공산당의 중앙위원이 됐다. 일제 시절에 도합 12년이나 감옥에서 보냈는데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김천해는 수많은 일본인 동지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일본어나 일본 문화에 조예가 깊었다. 한데 일본인들과 오랫동안 가까이 지낸 그를, 과연 누가 ‘친일파’라 부르겠는가? 일본어로 쓴 소설로 일제 시절 차별받는 조선인들의 이중적 정체성이나 ‘동화’에 대한 사회적 압력의 내면화 과정을 뛰어나게 묘사한 김사량(1914~1950)은 과연 ‘친일파’인가? ‘친일’의 ‘일’은 결국 ‘일본’이라기보다는 ‘일제’를 가리킨다. ‘친일파’는 정확히 말하면, 일제식민당국이라는 정통성 없는 권력에 참여했거나 “부당한 거래”를 자발적으로 진행한, 특히 이미 광의의 지배자적 위치에 있거나 그런 위치를 점하려 하는 피식민 사회 구성원을 일컫는다. 그들의 행위는, ‘민족적 배신’이라기보다는 “무법적 권력에 대한 부역”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계급사회의 권력은 늘 내재적으로 폭력적이다. 예컨대 계급지배관계를 본질적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법 절차 따위가 없을 때가 많다. 최근에 새로이 각광받은 <게공선>으로 유명한 일본의 프로문학자 고바야시 다키지(1903~1933)를 기억하는가? 공산당원인 그는, <1928년 3월15일>이라는 소설(1928년)에서 경찰들의 고문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공교롭게도 본인도 결국 검거당해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 공산당원이나 아나키스트 등 체제의 적극적 반대자에 대해서 체제는 종종 고문이라는 노골적인 폭력으로 대응했다. 한데 보통의 경우에는 일본 ‘내지’, 즉 자국 내에서는 일제 당국자들이 고문 등 극단적 폭력의 사용을 자제했다. 근대적 권력은 아무리 내재적으로 폭력적이라 해도, 그래도 ‘국민’ 다수의 동의를 기반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자국 내에서는 법·절차를 내세우게 돼 있다. ‘국민 국가’란 으레 그런 것이다. 


한데 자국 내에서는 아무리 ‘자제’한다 해도 식민지나 점령지에서는 근대 국민 국가의 폭력성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다. 식민지의 인민들은 ‘국민’이 아니거나 ‘2등 국민’이었기 때문에 자국 내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식민지에서는 거리낌 없이 해도 된다. 일본 ‘내지’에서는 급진적 활동가가 아닌 경우 고문은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는 피의자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폭력적 수사는 그냥 다반사였다. 공산주의자이긴커녕 열렬한 반공주의자이자 거물 친일파 윤치호의 사촌동생이기도 한-나중에 이승만의 측근이 되었고 박정희 시절에는 서울시장과 공화당 의장까지 지낸-윤치영(1898~1996)마저도 온건한 유지급 인물들의 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938년에 투옥됐을 때에 상당한 수준의 고문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만약 ‘내지인’, 즉 일본인이라면 고문을 당했을 리가 없다. 한데 식민지에서라면, 일본인 형사에게는 가장 부유하고 보수적인 조선인 명망가마저도 그저 일개 폭력의 대상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친일’이란 무엇인가? 그 어떤 견제도 불가능하고 언제든지 노골적인 폭력으로 전락할 수 있는 무법 권력에 대한 부역행위다. ‘민족’을 떠나서 이런 행위는 근대적 시민사회를 건설하려는 곳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부역행위를 하다 보면 본인도 결국 타자들을 향해서 그 노골적인 폭력을 대행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친일행위는 국내적으로도 토착사회 위에서 군림하는 폭력조직인 식민당국의 일원이 되고 폭력 종범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국제적으로도 일제의 가해행위에 가담하여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예컨대 박정희의 괴뢰 만주국 보병 제8사단 복무와 (아마도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포함한 것으로 추측되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 ‘토벌’ 참가는 ‘민족 배신’ 차원을 넘어 나중에 동경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전쟁범죄인 일제의 중국 침략에 가담한 행위였다. 사실 상당수의 친일파들이 피침략 국가에서는 ‘악질적 침략 종범’의 모습을 보였다. 예를 들어 나중에 문교부 장관과 여러 대학의 총장을 지내고 박정희의 ‘역사 교사’로 이름을 날린 사학자 이선근(1905~1983)은 만주국에서 일군에 군량미를 납부하는 안가농장을 관리했던 시절에 중국인에 대한 가혹한 태도로 중국 농민 사이에 악명을 떨쳤다. 친일파들의 이와 같은 중국 침략 가담은, 결국 나중에 연변의 조선인들을 보는 중국 사회 일각의 시선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등 오랫동안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기게 된다. 


‘민족 배신’이라기보다는, 국내외적 권력형 폭력에의 가담이야말로 ‘친일파 문제’의 핵심이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되찾는’ 일이라기보다는, 폭력 사회에서 정상 사회로 가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친일파가 초기부터 사실상 권력을 그대로 승계해온 대한민국의 명백한 특징은, 식민지적 폭력성이 그대로 이어져 오히려 확산된 것이었다. 조선인이라면 아무나 무조건 고문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친일경찰 출신들이나, 중국 등지에서 현지인을 학살하는 일에 익숙해진 일군 장교 출신들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테두리 안에서도 자국민을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됐다. 광복 70주년이 지난 시점에서 친일파 이야기를 왜 꺼내느냐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 이야기를 아마도 광복 100주년이 돼도 계속 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절대적 보호 아래서 반공의 ‘보루’가 되어 신생독립국가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그대로 이어받은 친일파들이 구사해온 식민지적 대민통치방식이 지금도 그대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백남기 농민의 경우를 보라. 그를 조준해서 물대포를 직사한 경찰의 행위를, 마땅히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미수로 규정해야 한다. 정상 사회에서 경찰의 업무는 ‘질서 유지’라면, 그 어떤 폭력행위도 하지 않았던 백남기 농민에게 일부러 죽이려 하듯 물대포를 쏜 것은 ‘자국민과의 전쟁’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이 권력형 범죄행각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도 책임자 처벌도 없다. 일부 지배층을 제외한 나머지 자국민들을 말을 잘 들으면 단순한 통치 대상으로, 말을 약간이라도 듣지 않으려 하면 제압해야 할 적으로 파악하는 듯한 통치방식은, 과연 어디에서 파생된 것인가? 식민지 시대 부역자들이 그대로 권력을 이어받은 사회가 아니라면 자국민을 식민지 백성처럼 대하는 일은 가능하겠는가?


친일파에 대한 단죄는, 그 의미가 불분명하고 억압적 느낌이 강한 ‘민족정기’가 아닌,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필요하다. 권력과 폭력이 거의 동의어가 된 이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과연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가? 성인 사회의 만연된 폭력이 학교 폭력으로 이어지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주먹이 곧 정의라고 배워버리고 만다. 한국 사회 폭력화의 한 주범인 친일파에 대한 분명한 정리가 결국 사회 전반의 탈폭력화의 한 출발점이 될 것을, 나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열망한다. 





Source: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31734.html



 

 

 

 

 

 

散文詩()

- 신동엽(월간문학 1968. 11. 창간호)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 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신동엽시인은 내 아버지와 같은 연도(1930)에 태어난 아버지같은 시인이다. 625전쟁중 극심한 허기에 민물게를 날것으로 먹다 간디스토마에 걸려 그 연유로 인해 1969년 4월에 간암으로 타계했다. 북구유럽의 선진적 정치인과 제도를 흠모하는 부분이 학창시절이나 지금이나 감동적이다.

누가 단군조선을 신화라 말하는가 ?

 (주간동아 2002 8 29 일자)

심백강 박사,
중국사고전서에 기록된 역사 밝혀내

역사학계 능력부족으로 실체규명 외면


"
() 임금 때인 무진년(B.C. 2333)
신인(
神人·성인보다 한 단계 위의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니,
조선인(
朝鮮人)이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이것이 조선이 나라를 세운 시초다
.

정초(
鄭樵)가 지은통지략’(通志 )에 이르기를
조선이라는 나라는 왕험(
王險)에 도읍을 정했는데, () 시기의 낙랑군이 그곳이다.

모씨(
茅氏)상서록’(象胥錄)에 의하면
단군과 아울러 기자(
箕子)도 왕양(王壤)에 도읍을 정했다.

역사에서는 위만도 왕험에 도읍을 정했는데, 곧 평양이다. (하략
)”

단군의 실존에 관한 중국측 역사 기록 중 한 대목이다
.
굴 속에서 21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어 여인으로 변신한 곰과 사람(환웅) 사이에서 단군이 태어났다는 식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

그것도 청나라 때의 유명한 역사학자 오임신(
吳任臣)이 지은
산해경광주’(
山海經廣注)라는 정통 사서에 등장하는 글이다.

중국 진(
)나라 학자 곽박이 지은산해경주를 바탕으로,
오임신이 그 주석을 널리 보완하는 형식을 취하며 지은산해경광주
’.
현재 전체 18권이사고전서’(
四庫全書)에 수록돼 전해 내려오고 있다.


과연사고전서란 어떤 책인가
.


중국 청나라가 국력을 기울여 편찬한 동양 아니 세계 최대의 총서로
,
선진(
先秦) 시대에서 청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주요 전적들을 가려 수록한 책만 무려 79000여권.

연인원 3000여명이 동원돼 무려 10년에 걸쳐 완성된 대작이다
.
그래서 중국 학자는 물론 한국과 일본 학자들도 사고전서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다
.


단군역사 언급 9종류 확인


바로 그사고전서를 일일이 뒤져 단군에 대해 기술한 저작들을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인 학자가 있다.
민족문화연구원(이사장·강동민) 원장인 심백강 박사(47·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그 주인공
.

사고전서는 경(
((()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된 체제입니다.

이중 단군의 역사에 대해 언급한 것이

-
자부에 3, - 사부에 4, - 집부에 2개 등


모두 9종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

우리나라 강단 사학자들이 외면하는 단군 역사를 중국 정통 역사서가 뒷받침해 준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

최근 심박사는 중국을 수십 차례 드나들며 찾아낸 것들을

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민족문화연구원 학술총서 제7)라는 자료집으로 엮어냈다.

원서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은 대중서라기보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자료 성격이 짙은데
,
단군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대목을 네모꼴 모양으로 굵게 표시해 두었다
.
그중 한 대목을 찾아 띄엄띄엄 읽어보니 매우 충격적이다
.

전부(
錢溥)가 지은조선국지에 의하면 세 종류의 조선이 있다.
하나는 단군조선이요
,
또 하나는 기자조선이요
,
나머지 하나는 위만조선이다
….”
(‘
산해경광주’ 18
)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가

단군이 B.C. 2333년에 조선(고조선)을 세웠다는 정도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과는 달리
,
이 중국측 기록은 고조선이 하나가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시작해 위만조선에 이르기까지 세 단계의 역사를 밟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심박사는 더 흥미로운 사실도 지적한다
.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인정받던 단군의 실체가

일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철저히 은폐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
그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여겼던 명나라도 단군 역사를 교묘하게 가리려 했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사고전서 집부(
集部) 편에 역대의 부()를 모은어정역대부휘’(御定歷代賦彙·청나라 때 편찬됨)라는 책이 있어요.

이중 단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것이 조선부(
朝鮮賦)라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명나라 효종 때의 동월(
董越)이라는 사람인데,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참고해 조선부를 지었다고 하지요
.

아마 중국인의 입으로 단군조선을 직접 언급한 현존 자료 중 가장 시기가 앞선 기록일 겁니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고전서 사부(
史部) 편에도 똑같이 실린 원래의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쏙 빠져 있어요.”


고조선은 하나 아닌 3단계 역사


그러니까 명나라 때 처음 씌어진 조선부에는 단군 기록이 빠져 있는 대신
,
그 후인 청나라 때 편집한어정역대부휘안의 조선부에서는 똑같은 저자의 이름으로 단군조선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 객관성과 권위를 따져볼 때 어정역대부휘가 단연 앞섬은 두말할 나위 없다
.

심박사는 이를 두고

명나라에서 우리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려 했던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
는 의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동이족보다 그 역사가 짧은 한족(
漢族)이 주도적으로 세운 명나라는 대국의 자존심상 동이의 후손인 조선을 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단군과 고조선 관련 사료는 명나라의 직접적 간섭을 받던 조선조 때 많이 인멸됐고
,
이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거의 말살됐다는 게 심박사의 해석
.

그러다 보니 강단 사학계 일각에서는 단군 역사를 실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신화로 취급하거나
,
심지어는 고려 때 항몽전쟁이나 일제 때 항일민족주의 감정의 소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는 것
.

바로 그 때문에사고전서 중의 단군사료는 중국의 문헌을 근거로 단군의 실재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

심박사는 이 자료집 외에도 16∼17세기 문헌인조선세기’(
朝鮮世紀)를 처음으로 발견한 학자로 유명하다.

명나라의 오명제(
吳明濟)가 지은 이 책은 조선 영조 때 편찬됐다가 고종 때 중간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역대서적조에 제목만 전해져 오던 것이다.

지어진 지 4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빛을 본조선세기는 특히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 삼조선의 역사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는데
, 위만조선부터 다룬 사마천의사기나 기자조선 이후만 인정하는 대부분의 중국 사서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또 단군왕조의 시작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신화적 내용 대신가화합(
假化合)을 이뤘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하나
.

우리나라 학자들은 광복 50여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고전 문헌에 산재한 단군 및 고조선 사료를 왜 찾아보지 못했을까
.

심박사의 해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
첫째는 우리의 눈으로 역사를 보는 자주적 사관이 없었기 때문이고
,
두번째는 한문 해독능력 문제를 꼽을 수 있을 거예요
.
중국 원전을 해석하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
아마 우리나라 역사학자 중 그런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세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


이렇게 단언하는 심박사는

한학자 집안에서 자라 5세 때 천자문을 독파하고 16세 이전에 사서삼경을 독파한 수재
.

19
세 나이에는 당대의 유명한 학승 탄허 스님을 만나 한문으로 문답을 나누는 등 뛰어난 한학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

1983
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10년 만에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현재 민족문화연구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사학자들의 단군 및 고조선 연구를 돕기 위해 주로 중국측 사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있다
.


<
안영배 기자 >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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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바로 읽기'의 김운회 교수 주장

    
    (서울=연합뉴스) 이봉석 기자 = "나관중 삼국지는 읽는 것보다 아예 읽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삼국지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꾸며서 교묘하게 중화주의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사회과학적 시각으로 나관중 삼국지를 새롭게 파헤친 `삼국지 바로 읽기'(  2.삼인 펴냄)의 저자 김운회(43) 동양대 경영관광학부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김 교수는 삼국지를 `중국판 용비어천가', `동북공정보다 더 위험한 촉한공정(蜀漢工程)'이라고 몰아붙였다.

    "나관중 삼국지는 진수의 정사(正史) 삼국지에서 출발해 한족이 이민족의  압박을 받거나 정치적 통합을 꾀하는 시기마다 새로운 해석이나 주석이 보태져 완성됐습니다.

() 황실을 계승한 유비의 촉나라가 정통성을 가졌다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을 담은 촉한공정인 셈이죠. 동북공정은 100년이면 끝나겠지만, 촉한공정은 벌써 1천 년이 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동북공정보다 삼국지에 담겨 있는  촉한공정을 더 경계해야 합니다."

    김 교수는 처세술에서 정당한 방법보다 이간계(離間計)에 더 의존하고 있고, 온갖 과장으로 점철돼 결과적으로 우리 역사를 초라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삼국지의 해악이 크다고 지적한다.

    "삼국지는 한 마디로 말하면 `저질'입니다. 이간질과 스파이전 등으로 넘쳐나죠. 현대인들에게 필독서나 처세술서로 읽히기에는 위험한 책입니다.

또 삼국지를  보면 100만 대군이니, 적벽대전에서는 짚으로 만든 배를 이용해 화살 10만 개를 줍고  동남풍을 부르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모두 허구입니다. 당시 100만 대군이 동원될 정도면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겁니다.

실제로는 최대 10만 정도였죠.  이런  것을 액면 그대로 믿어버리면 우리 역사는 그만큼 시시하고 초라해지는 거죠."
    김 교수는 정사 삼국지뿐 아니라 후한서(後漢書), 진서(晉書) 등을 직접 해독해 나관중 삼국지의 사실과 허구를 가려냈다. 저자에 따르면 촉나라는 진나라에 비하면 `깡촌'이었고, 유비는 `쪼다'가 아니라 `히딩크식 올라운드 플레이어'였으며,  제갈량은 제대로 이긴 전쟁이 없고, 관우는 촉한공정의 최대 수혜자였다.

    "제가 봤을 때 삼국지의 사실과 허구의 비율은 5:5(사실 허구가 80%-펌자) 정도입니다. 문제는  일반인들이 소설로 읽으면서도 등장인물들이 모두 실재인물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  믿어버린다는 겁니다. 글을 프레시안(www.pressian.com)에서 연재하면서 국내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는 삼국지 마니아들의 공격에 많이 받았습니다."
    

경제학 박사인 김 교수가 책을 내게 된 것도 우연히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국내 출판계에서 삼국지 시장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기 때문이다. 그 나름대로 독특한 시각을 반영했다는 삼국지조차 나관중 삼국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이미 1500만 권이 팔렸다는 이문열 씨의 삼국지는 중고서점에서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랍니다. 심지어 삼국지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중고서점이 있을 정도였죠.

문제는 모두가 삼국지를 성역처럼 받들고 그 안에 담긴 문제점을 보려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연구자들도 대부분 충효니, 춘추사관이니, 대의명분이니 하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데 놀랐습니다."

    김 교수는 "삼국시대는 중국역사의 통일기가 아니라 516국이라는    혼란한 시대로 가는 관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유비가 없었다면 조조의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유비를 중국 역사의 반역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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