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을 찾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잃어 버렸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검은 색 서류가방이였고 가방 속엔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가방 분실물 쌓아 놓는 곳을 가면 거기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곤 잠에서 깨어났다. 방안 풍경은 처음보는 낯선 것들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지...
"일어났어요? 잠꼬대를 많이 하시더군요"
내 앞엔 어깨까지 내려온 생머리의 중년 여성이 미소를 지으며 낯설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반쯤 열려진 창문엔 보라색 커튼이 방안으로 밀려드는 바람에 거대한 깃발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제 남편이 올꺼예요"
"........"
그녀는 또렷한 발음으로 나에게 일어날 것을 재촉하는 듯했다. 어제란 기억이 없다. 아니 과거란 기억이 사라졌다. 침대에서 반쯤 일어나 앉으면서도 나에게 친절한 저 중년여성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를 떠올렸지만, 눈꼽이 낀 건조한 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기조차 힘들었다. 침대의 하얀 린넨과 이불들이 구겨지고 방바닥에 닿은 채 어제 잠자리가 거칠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누구시죠? 왜 제가 여기서 자고 있었는지...남편이 온다면 제가 빨리 나가야겠군요"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없어요. 부억에 가셔서 아침 식사 하세요. 화장실에서 씻으시구요.방은 아줌마가 정리해줄꺼예요."
"네. 그런데 제가 왜 여기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같이 어눌한 발음을 느껴며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얼굴에 주름살이 깊게 패인 이마를 움직이며, 애써 미소를 짓고는
"나중에 말씀드릴께요, 지금 식탁엔 두 꼬마와 삼촌이 식사를 하고 있을거예요. 그냥 자연스럽게 앉아서 식사하세요"
나는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었고, 입고 있는 상태를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개운하지 않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아줌마! 이 분 식탁까지 안내해 주시구여 이 방 정리 좀 해주세요."
"네..."
짧은 대답과 함께 열려진 문앞으로 다가와 멈춘 키 작은 또래의 아줌마가 앞치마를 두른 채 나를 쳐다보면서 상냥한 미소를 짓는다.
"절 따라오세요"
"네..."
기억은 사라진 채 의식만 살아있는 듯한 내 머릿 속엔 온통 의문만이 뱀처럼 날름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키는데로 해야만 될 것 같다.
이상한 그녀
내가 나온 방에서 왼쪽으로 돌아 스무발자국 정도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들어서자 음식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6인용 식탁엔 깔끔한 정장 차림의 삼촌인 듯한 사람이 이상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 나란히 앉은 꼬마 둘이 다크서클이 깊게 드리운 시선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 어깨가 가볍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내 어깨를 내려와 편안하게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이 그렇다. 음산한 기운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난 얼굴을 기억할 수 없는 아줌마의 손짓에 의해 삼촌이란 사람의 옆에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탕국이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나를 째려보듯이 쳐다보는 두 꼬마에게 미소를 지으며 숟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밥을 먹지 않고 계속 뚫어지게 내가 식사하는 모습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마치 원망 가득한 그런 얼굴과 눈빛으로 시선을 놓치 않는다는 것을 내내 느끼며 말이다. 그러나 그 기분이 유쾌했다. 나를 괴롭히던 꼬마 둘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난 오늘 그들의 세계에 들어와 흑백사진으로 남겨진 그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축하의 만찬인 듯 했다.
"밥 먹어라. 내 얼굴이 이상하니?"
나는 불쑥 두 꼬마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동시에 입을 삐죽거리며 초점이 없는 눈동자를 나에게 보내고만 있었다. 묵묵히 식사를 하던 삼촌은 핏기없는 얼굴을 들고는 잠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미소를 띠며, 손짓으로 식사하라고 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눈은 보이질 않았다.
그 순간 그녀의 남편이 온 듯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분주한 것 같았다. 나는 배가 부를만큼 식사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잠잤던 방으로 다시 걸어갔다. 방문에 들어서자 마자 난 그녀가 무랑루즈의 무희들처럼 빨간 나이트가운을 걸친 것을 발견했다. 옆에선 아줌마가 옷 매무새를 봐주고 있는 듯 했다. 곧이어 아이들이 날 따라왔다. 그리곤 엄마에게 달려가 그녀를 붙잡고 떼를 쓰는 듯 했다. 그런데 두 꼬마의 표정은 역시 침울한 표정들이었다.
"식사 잘 하셨어요. 아이들이 당신을 아주 미워해요. 이해해주세요. 당신을 떠나 보내야 하는 게 슬프고 화가나나 보네요"
그녀는 나의 의식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전율로 느끼고 있었다. 기억에서 사라진 과거여도 나에겐 생생한 고통의 한 가운데 그 꼬마들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은 못하지만 그들이 내 삶을 짓누르며 같이 했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이제 두 꼬마는 나를 놓아줘야 하는 시기가 못내 불만이 가득하고 화가난 것이 당연하리라 생각했다.
"마님. 이제 안방으로 가셔야지요"
"네. 가야죠..."
아줌마는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잠자리를 준비하는 여자처럼 비장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재촉하는 듯 했다. 방안 창문은 완전히 열려져 흐린 아침의 스산한 바람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보라색 커튼은 여전히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애원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그녀가 내 여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갑자기 심한 아픔이 가슴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것 같았다.
"기다리세요, 금방 나올꺼예요"
"네..."
나는 억지로 그녀를 위로해야 한다는 감정이 복받쳐 간단히 대답을 했다. 그녀는 허벅지가 드러난 서양식 까운을 입고는 끌려가듯 저만치 총총 걸음으로 안방을 향해 걸어간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두 꼬마들은 여전히 나를 증오하는 눈빛으로 보고만 있었다.
두 꼬마
침대는 깨끗하고 반듯한 모습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직감적으로 과거 속에 나와 관련된 모든 존재들이 사물에겐 색깔을 부여하고, 존재들에겐 색깔을 뺏어 간게 분명한 것 같았다. 밥과 탕국 그리고 여러 반찬을 먹었지만, 뱃속에선 육식의 기운들이 트림과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포만감을 한껏 더 느끼면서 말이다.
그리곤 다시 침대이불위에 앉았다.
"꼬마야! 너희들 이제 밥 먹어야지. 물론 나이는 나보다 많겠지만, 꼬마로 살아야 하는 게 내탓은 아니잖니?"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는 두 꼬마 감시자를 향해 말을 던졌다. 초점이 흐려지는 두 꼬마의 눈빛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방안에서 나가게 한 뒤 난 어느새 눈이 감기는 것에 저항할 수 없었다.
가방을 찾아라
나는 골목을 향해 뛰어갔다. 가방 분실물들이 분류되어 쌓여진 곳을 찾았다. 이리저리 수 많은 가방들을 훑어보며 검정색 서류가방을 정신없이 찾았다. 가방은 생각보다 금새 찾았다. 가방은 "마고일지"란 예닐곱 책이 담겨진 큰 봉투 아래에서 발견했다. 가방이 많이 낡아 있었다. 그렇지만 가방을 열어보진 않았다. 가방을 들고 의식을 향해 다시 뛰었다. 여러사람들이 나를 뒤쫓아 오고 있었다.
"도화님! 어제 잠을 잘 못주무셨나봐요?"
그녀는 어느새 단정한 옷차림을 한 채 내 옆에서 잠자는 나를 한동안 지켜본 듯 한 표정으로 가방을 찾아온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남편은 다시 외출했어요. 이제 우리만 남았네요"
"아! 네. 아이들은 어딨습니까?"
"남편을 따라갔어요...제 아이들 아니예요"
어느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중년의 그녀에게 두 꼬마는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은 당신과 관련된 아이들이예요"
"네...그 아이들은 기억은 없지만 저를 힘들게했던 두 개의 너무도 무거웠던 무게들인 것만은 확실히 느꼈습니다..."
"그러실거예요...이제 그 아이들은 당신이 자기들 원하는데로 안된다고 투덜거렸어요"
"그렇군요...난 그 아이들이 내 과거 기억의 저편에서 내 존재를 못마땅하게 느꼈다는 것까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저는 당신을 오늘 처음봅니다만 저에게 왜 이렇게 친절하신지..."
"저는 당신의 기억을 갖고 있는 여자일 뿐이예요"
그녀는 아까와는 다르게 아주 단아한 얼굴표정과 우아한 모습으로 마치 어머니와도 같은 온화하고 아름다운 미소의 여인으로 변해있었다.
"도화님! 이제 당신의 모습을 찾아가셔도 돼요...꼬마 둘이 지독한 절망을 주려했지만. 당신은 절망하지 않았어요. 그 아이들이 당신의 절망에 굶주려 했었거든요. 절망은 도화님의 것이 아니니 저 아이들이 화가 단단히 난거죠..."
"저...이름을 물어봐도 될런지요?"
그녀는 빛나는 눈동자로 나에게 한마디만 던졌다.
"좀 전에 도화님에게서 몇권의 제 책을 받았어요"
다시 깨어나다
"마님! 그들이 여길 찾아냈어요. 빨리 여길 피하셔야해요"
"도화님 저 가야해요...다음에 뵐 수 있다면 다시 보겠죠"
"어디로 가십니까? 저도 따라 가고 싶은데..."
"도화님은 다시 많은 색으로 뒤덮인 곳으로 가셔야지요..."
그렇게 말하고선 아줌마와 서둘러 나갔다. '철커덕'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난 혼자 남겨진다는 생각이 두려워 그들을 쫓아 나갔다. 하지만 문을 나서자마자 본 광경은 어두운 광장 저 앞쪽으로 하얗게 빛나는 터널만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곳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두 꼬마는 그녀와 아줌마를 쫓고 있었다.
저 멀리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화님! 문을 닫으셔야해요...앞으론 절대 그 문을 열지 마세요"
"네...그렇지만...전 어디로 가야하나요?"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알 수 없는 크기와 모양을 한 집에 들어서선 문을 굳게 잠궜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나를 깨우고 있었다.
"기억을 찾으러 가야하겠지..."